우리가 살고 있는 강릉에는 고을마다 그 고을 나름의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우리 대학이 있는 고을 또한 그러하다. 그러면 우리 대학주변의 고을은 어떤 고을이고,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 학교주위는 어떠한 지형으로 되어있을까?

학교 뒤에 있는 산줄기를 성산주령이라 하는데, 성산주령은 한반도의 허리뼈에 해당하는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곤신봉에서 동쪽으로 내려온 줄기로 강릉을 받쳐주는 기둥이다. 그 기둥 한 가운데 학교가 있다. 학교 위쪽에 우뚝 솟은 봉이 솥봉(鼎峰)인데, 솥봉은 명산으로 줄기가 3가달로 뻗어내려 산줄기가 마치 가마솥의 발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학교주변은 사방이 소나무 숲이다. 앞에는 남대천 물줄기가 유유히 흐르고, 뒤와 양옆으로는 산줄기가 감싸고 있다. 산줄기는 학교를 포근히 감싸 아늑하고 바람을 잠재운다. 그래서 재난이 없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류형(背山臨流型) 남향받이다. 남향받이는 햇볕이 잘 든다. 햇볕은 모든 생명체의 성장과 결실을 돕는다. 이렇듯 우리 학교의 지형은 더 할 나위 없이 좋다.

다음은 학교주변의 역사문화 환경은 어떠한가. 환경의 중요성을 말할 때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를 예로 든다. 맹자(중국 춘추전국시대 추나라 사람)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 그는 길쌈을 하면서 아들을 키웠는데, 처음에는 저자거리에서, 두번째는 공동묘지 부근에서, 세번째는 서당 부근에서 키웠다. 저자거리에서는 물건을 흥정하는 놀이를 하고, 묘지부근에서는 상여 메는 놀이를 하고, 서당 부근에서는 공부하는 모습을 흉내를 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안도하며 서당부근에서 아들을 키웠다. 불경에는 ‘청정토에 가면 청정심이 생기고, 혼탁처에 가면 혼탁심이 생긴다.’ 고 했고, 맹자는 ‘머무르는 곳이 기질을 바꾼다(居移氣)’ 고 하였고, ‘먹는 귤을 회수(淮水)를 중심으로 따뜻한 남쪽인 회남(淮南)에 심으면 귤이 되고, 추운 회북(淮北)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 는 중국의 고사 귤화위지(橘化爲枳)도 있다. 이 말은 환경의 중요성을 말한다. 사람의 인성을 형성하는 데는 생활하고 있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학교 뒤 산줄기 밑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6호’인 임경당이 있는데, 이 건물은 임경당 김열(金說)이 지은 별채로 그는 자기의 호를 건물의 이름으로 삼았다. 고을 사람들은 그를 임영처사라 일컬었고, 집 앞에는 선대가 심은 수백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데 친우인 율곡 이이가 그의 집에 와서 집주위에 잘 자란 소나무를 보고 선대가 심고 가꾼 소나무를 후대가 정성을 드려 가꾸는 모습을 칭찬하며 『호송설』이란 글을 지어 주었다. 그 후 김열은 순조 때(1808년) 강릉 출신 가운데 성리학의 가치규범에 충실했던 12분을 모신 향현사에 추배되었다.

솥봉과 학교 사이에는 장안성지(長安城址)가 있는데, 명주성(溟州城), 장안성(長安城)이라고 한다. 이 성은 신라 때 9주5소경 가운데 하나인 명주의 성이다. 이 성에는 명주군왕 김주원이 머물었는데, 그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원성왕 2년 (786)에 서라벌에서 외가가 있는 명주로 와 이곳에 성을 쌓고 머물렀다. 오랜 세월이 지나 지금은 성터가 밭으로 되었는데 약 300여년 전 이곳에서 명주성(溟州城)이라 새겨진 지석(址石)과 기왓장이 나왔다.

학교 앞에 있는 남대천에는 예전엔 삼척 김씨의 큰 기와집이 있었는데, 그곳엔 정원과 연당이 있었고, 연당주변엔 숲이 우거져 여름이면 매미가 많이 날아와 울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집들이 더러 있었으나 큰 포락에 물줄기가 덮쳐 집들이 유실되어 없어지고 지금은 남대천 물줄기 한 복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는 지명설화다. 명주성 줄기 아래 학교가 있는데, 이곳이 홍제동 성하촌(城下村)이다. 홍제동은 조선시대 역원제도가 있었을 때 국영숙박시설인 홍제원이 있어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 홍제원은 강릉대도호부의 중심역인 대창역(옥천동 소재)과 이에 딸린 구산역(성산면 구산리 소재) 사이에 있던 원(院)으로 출장을 다니는 관원들이 머물던 숙소였다. 성하촌은 명주성 아래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학교와 강릉교도소 사이를 매미 소 즉 맴소(蟬淵)라 하는데, 이곳이 매미가 허물을 벗는 형상인 탈선형(脫蟬型)으로 되어 있어 생긴 이름이다. 맴소에는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강릉단오제의 주신인 대관령국사서낭과 혼배한 대관령국사여서낭인 정씨가 여인의 뫼와 그의 어머니(안동 권씨) 뫼가 있다.

또 맴소 아래에 있는 넓은 들을 공제(公堤)라 하는데, 이곳이 예전엔 홍제동의 중심마을이었다. 공제는 ‘조선 명종(1561년) 때 강릉부사를 역임한 김첨경(金添慶) 공이 쌓은 제방’이란 뜻인데, 김첨경은 매년 장마가 지면 남대천의 물이 넘쳐흘러 넓은 들을 메워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물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이런 지형적 배경과 역사적 환경을 가진 우리 대학의 주변은 강릉에서 널리 알려진 명당이어서 신라 때는 명주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한 관아가 있었던 것인데, 그 부근에 학교가 있다. 사라져가는 학교주변의 역사 · 문화적 환경을 살펴보는 일이 결코 허튼 일만은 아닐 것이다. 알면 아는 만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