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 여전히 아프다. 누구나 그렇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떠들며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지만 가슴 한편에 아픔이 자리 잡고 있다. 내 나이 스물 셋. 때 늦은 성장통을 겪으며 성숙해져가고 있다. 공부만이 전부였던, 그때는 세상 전부인 것 같던 풋사랑을 하던 그 시절의 나는 어느새 몇 년이 흘러 어른도 아이도 아닌 지금이 되었다.

20살이 되던 해. 19살과 20살의 차이, 10대와 20대의 차이란 것. 언니오빠들이 말하던 것이 이거구나 싶었던 그 해. 21살이 되어서는 1살 차이가 얼마나 큰 것인지, 20살의 나는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깨달았다. 작년, 22살의 나는 다가오는 세월이 무서워졌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수능에 목매달던 때와는 다른 또 다른 고통. 나는 더 이상 애가 아니었다. 잘못을 저지르면 어르고 달래며 혼내는 학생이 아니었다. 이제 사회가 나의 잘못을 함부로 허락하지 않는 그런 나이가 됐고, 23살의 반이 지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줄곧 생각해왔다. 청소년기의 사춘기는 그저 반항기였을 뿐 드디어 진짜 사춘기가 왔다고. 나는 20대의 사춘기를 겪고 있다. 남자친구들은 하나둘씩 군대에서 제대해서 사회로 나오고 여자친구들은 아직 학교를 다니거나, 일찍 취업해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서로가 만나는 횟수도 줄어들고 연락도 예전처럼 자주하지 않는다. 만나면 그저 장난가득한 수다만 떨던 우리가 잔 기울이며 돈걱정, 가족걱정, 미래걱정을 안주삼아 쓰디쓴 술과 함께 삼킨다. 하지만 씁쓸해도 슬프지 않다.

아이와 어른이 공존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변한다는 것, 사회에 물든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순수했던 몇 년 전의 내가 너무 그리워지는 요즘, 사회에 맞게 변하는 게 옳은 것인지 그런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게 옳은 것인지 계속 혼란스럽다.

사람들은 그렇다. 그때의 걱정이 그때의 아픔이 제일 크고 지나가면 사실 별일 아닌 게 돼서 다시 현재의 고민에 집중한다. 반년전만해도 나는 학교진학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고 지금은 학교를 다니고 있다. 불과 두 달 전에는 돈 걱정에 시달리다가 가까스로 해결됐다. 그러나 아직 아물지 않은 전 남자친구와의 이별의 고통이 날 괴롭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것이다. 지나온 세월이 가장 큰 깨달음을 주는 것은, 지나갈 것이란 것.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말이 모든 뜻을 품고 있다.

어른들이 보기엔 우리가 아직 어리겠지만 어리지만은 않다. 정말 어릴 때 처음 겪었던 아픔을 생각하면 그땐 정말 힘들었다. 죽고 싶었던 적도 많고 세상 모든 걸 놔버리고 싶었다. 지금 겪는 아픔도 여전히 아프다. 아픔의 정도가 다르진 않다. 그렇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변하는 게 있다면 아픔을 버틸 수 있는 요령을 터득했다는 것. 이렇게 한살한살 더 먹어가면 이런 아픔마저 무뎌질까 걱정된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실컷 아파야 한다. 그래서 스물 셋이 된 올해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내가 아프다는 게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다가올 행복이 더 크게 느껴지도록 해주는 것. 사소한 것에 즐거울 수 있도록 밑받침이 돼주는, 기쁜 일보다 더 많은 깨달음을 주는 소중한 것이다.

20살 때부터 작년까지 있었던 모든 일보다 올해 몇 개월간 내게 일어난 일들이 더 많고, 더 크고, 더 힘들었지만 그로인해 한껏 성숙해졌다. 초등학교 때 1년 새 키가 훌쩍 크던 그때처럼 ‘급성장’을 이루어냈다. 세월이 가면 저절로 인간관계가 정리된다던 그 말도, 연인과 이별해서 죽을 것 같이 아프다는 사람들도, 돈만 있으면 행복할거라던 사람들도, 나이를 먹을수록 부모님밖에 없다던 것도, 지금은 아무리 말해도 모를 거라고 커보면 다 알게 될 거라던 그 말도,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모두 비로소 깨닫게 됐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도 예전처럼 생각으로밖에 안 되는 것과 달리 마음으로 알게 됐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다가올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더 많이 힘든 일을 겪을 거고 더 많이 아프고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겠지.

지금도 아프다. 그래서 나는 아직 젊다.